사천왕상은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을 형상화한 불교조각을 말하며, 사방의 천왕인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 다문천왕을 도상화한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사천왕상에 대한 규범이 일정하지 않아서 귀족의 형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으나, 서역을 거쳐 중국에 이르러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때는 사천왕 신앙이 수용된 600년 경이며, 크게 성행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부터입니다.
신라·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은 방위는 바뀌지 않고 지물만 변경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석굴암 및 고려불화 등 고려시대까지 나타나는 사천왕은 지물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북방 다문천왕은 항상 보탑을 들고 있으므로, 다문천왕을 기준으로 방위를 결정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갑자기 비파, 용과 보주, 보당을 든 사천왕상이 등장합니다. 이때 방위가 바뀐 것이 아니라, 지물만 변경되어 원래 위치에 배치된 것입니다.
현재의 사천왕상은 조선 초기에 불교도상집(중국의 판본)의 전래와 천왕문이 본격적으로 건립된 이후의 것으로 방위와 명호는 바뀌지 않고 각 사천왕상의 지물만 바뀌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의 불화와 최근 발견된 사천왕상의 묵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673년 장곡사 괘불탱화, 1687년 마곡사 괘불탱화, 1776년 천은사 아미타후불탱화 등에는 사천왕상 옆에 명호가 쓰여져 있는데, 비파를 들고 있는 상이 북방 다문천왕, 탑과 보당을 들고있는 상이 서방 광목천왕입니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승주 송광사 사천왕상의 경우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 사천왕상 하단에 제작당시 묵서로 북방천왕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통도사 사천왕상도 소제작업을 통해 보검을 든 사천왕상(진입방향 우측 첫 번째 상)에서 동방 지국천왕이라는 묵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통도사 사천왕상의 명칭은 현재 학계에서 그간의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명호에 대한 변경을 추진하고 있는 바, 그간 잘못된 사천왕상의 명호를 바로잡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명호를 변경하였습니다.
괘불탱은 불교회화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그림으로 야외에 법회를 열 때 걸어서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입니다. 거대한 괘불을 걸기 위해서는 괘불대를 비롯한 여러 장비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 공개됩니다. 석가탄신일이나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예수재(豫修齋) 등 많은 대중이 모이는 날 불전 마당에 걸어 모시며,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재(祈雨齋)에 모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사찰이 인력 부족이나 재정적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공개되지 못하고 있어, 평생을 절에 다녀도 인연이 없으면 친견하기 어려운 유물이라는 인식이 신도들 사이에 퍼져있습니다. 야외에 괘불을 내걸고 야외에서 거행되는 야외법회를 통칭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고 하는데, 괘불을 법회장소로 옮기는 이운의식(移運儀式)을 비롯하여 나비춤, 바라춤 등 다양한 불교무용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무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야단법석이라는 말의 어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괘불 조성의 전통은 우리나라와 티베트지역에만 전래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17세기에서부터 20세기에 걸쳐 제작된 약 80여 점의 괘불이 남아 있으며, 절반 이상이 영남지역 사찰에 소장되어 있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도사성보박물관에서는 전국의 사찰에 소장되어 있는 괘불을 소개하기 위하여 40년 계획으로 매년 봄·가을에 걸쳐 괘불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특히 특별전 개막식에는 괘불 이운의식을 비롯한 다양한 범패의식을 재현하여 관람객 모두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편 통도사에는 특이하게 1767년, 1792년에 제작된 2점의 괘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두 점 모두 석가모니불을 보신(報身)으로 표현한 불화로서 좌우 성중들을 생략하고 단독상의 보살형 여래를 화면 중심에 크게 배치한 가장 간략한 구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상호는 자비원만하며, 보관에는 7화불(化佛)을 모시고 손은 두 손을 들어올려 설법인을 취하면서 연화가지를 들어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염화미소(拈花微笑)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괘불이 한 절에서 전래되는 것은 유례가 없어 무슨 이유에서 똑 같은 형태의 괘불이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공개되는 괘불은 1767년에 제작된 괘불로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유물이다. 삼베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이 괘불은 높이가 12m, 폭이 약 5m에 달하는 대형 괘불로, 두훈( 薰), 성징(性澄) 등 11명의 스님에 의해 그려졌다. 괘불에 관련된 자료에 따르면 이 괘불의 시주자들은 대부분 부산 동래지역의 신도들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사리는 범어(梵語:Sanskrit)의 Sarir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인으로, 원래는 신체라는 뜻이나 불교에서는 석존의 신골을 뜻하며 불교도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예배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사리는 불사리(佛舍利)와 법사리(法舍利)로 나누어지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승려의 화장골까지도 합하여 넓은 의미에서 사리라고 통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법사리란 석존의 정신적 유산인 불경(佛經)을 비롯하여 치아(佛齒), 손톱(佛爪), 머리카락(佛髮), 석존 재세시에 사용하신 옷, 바리때(鉢), 지팡이들도 포함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사리는 그 수가 극히 한정되어 있으므로 사리를 대신하여 벼(稻), 우황(牛黃) (소 뼈 속의 결석(結石)으로 이를 여의주(如意珠)처럼 생각하였다고 한다)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석가의 가르침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마치 벼가 성숙하고 결실하여서 볍씨가 되어, 그 한 알이 곧 싹이 나고 잎이 나며 이삭이 나와, 수없이 많은 수의 벼를 생산하듯이, 크게 인류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사리를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탑에서 간혹 종자가 발견되는 일 -의성 관덕동 석탑- 이 있는데, 이런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석존의 입멸 후 5∼6세기까지 부처님을 형상화하지 못한 이른바 무불상(無佛像)시대에도 불교신앙은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리신앙이 주가 되었습니다. 사리는 종자(種子:bija)로 부르고, 사리를 봉장하는 반원형의 스투파는 사리를 봉안하는 알(卵:anda) 또는 태(胎:garbha)로 불러왔는데, 적어도 인도에서는 이러한 형태로 석존은 오래오래 삶을 이어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도사가 위치해 있는 영축산의 한자 표기는 ''靈鷲山''과 ''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지만 이에 대한 한글표기는 「영축산」, 「영취산」, 「축서산」, 「취서산」 등으로 표기되고 있어 통도사를 찾는 분들의 혼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은 한자 ''鷲''자에 대한 한글표기의 문제에서 비롯되는데, 일반 옥편에서는 ''독수리 취''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예를 들어, 탱화(幀畵)라고 할 때 ''탱(幀)''자는 옥편에 ''정''자로 찾아야 나오고,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菩提)는 한자 사전식으로 ''보제''라고 읽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鷲''자가 원래 ''축''으로 표기되었다는 근거는 1463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언해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 이름 혼동의 원인은 불교에서 유래된 ''축(鷲)''자를 일반인들이 접하기 쉬운 한자사전의 표기 ''취''로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축산이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계기가 통도사의 창건에서 비롯되었으며,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의 사람들은 이 산을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과 동일한 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영축산이라 이름지었고, 이곳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최근 양산시에서는 영축산에 대한 그 동안의 혼동을 바로잡고 고유의 산 이름 찾기 위하여 지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명의 유래와 단일화를 위한 자료조사와 의견수렴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1년 1월 9일 양산시지명위원회를 개최하여 영축산이 타당하다는 최종 결론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따라서, 영축총림 영축산 통도사라 부르는 것입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앞으로도 많은 관심 기울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삼보란 불교 성립의 삼대요소인 불(佛: 교주)·법(法: 교법)·승(僧: 승단)을 뜻하며, 삼보사찰이란 바로 이들 삼보를 상징하는 사찰을 말합니다.
즉, 팔만대장경판을 모신 법보사찰 해인사, 보조국사(普照國師) 이래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金 袈裟-어깨에 걸쳐 입는 옷)가 봉안되어 있는 통도사는 삼보의 으뜸인 불보사찰의 위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통도사를 한국 불교의 으뜸(佛之宗家)이자 가장 큰 절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부처님의 진신인 사리가 금강계단에 모셔짐으로 인해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통도사에 봉안된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것입니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하사한 막대한 양의 비단과, 채색옷감, 대장경 400권, 불교용 깃발(幡幢), 꽃으로 장식된 가리개(花蓋) 등을 함께 가져와 통도사를 창건하였습다. 따라서 통도사는 불사리와 가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도사가 위치해 있는 영축산(靈鷲山)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Rajarha)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었습니다. 이 산에서 석가모니는 『묘법법화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고, 이 광경은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하여 불교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장율사가 이곳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印度靈鷲山形)"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또한 사명(寺名)의 다른 의미로는 통도사가 신라시대의 계율근본도량(戒律根本道場)으로, 전국의 모든 출가자는 금강계단에서 계(戒)를 받아야(爲僧者通而度之) 정통성이 인정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모든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度衆生)"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저희 박물관 홈페이지를 찾아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귀하께서 질문하신 통도팔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도팔경(通度八景)
무풍한송無風寒松 : 매표소가 위치한 영축산문에서 일주문에 이르기까지 노송이 어우러진 풍광을 만날 수 있음.
안양동대安養東臺 : 일출시 안양암에서 큰절 쪽을 보는 경관으로 안양암의 안양은 극락을 뜻하기도 한다.
비로폭포毘盧瀑布 : 비로암 서북쪽 30미터 거리에 있으며 낙수소리가 일품임.
자장동천慈藏洞天 : 자장암 계곡을 따라가면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물소리와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수많은 소(沼)가 달빛을 받아 연출하는 풍광은 과히 장관임.
극락영지(極樂影池) : 영축산의 수려한 풍광을 담고 있는 극락암의 연못.
백운명고(白雲鳴鼓) : 옛날 염불당이 있을 때 들리던 백운암의 큰 북소리.
단성낙조(丹城落照) : 임진왜란 당시 영축산 정상에 축조한 성에서 바로보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
취운모종(翠雲暮鐘) : 옛날 산내 암자인 취운암으로부터 들리는 저녁종소리가 너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큰절에서 올리는 저녁 범종소리를 취운암에서 들으면 아름다워 통도팔경으로 보았다는 말도 있음.
이 통도팔경은 조선시대 당시 통도사 주변의 풍광에 대한 아름다움을 얘기한 것으로 세월이 지나며 가람배치도 달라지고 사찰 환경이 변화되면서 풍광의 아름다움도 다소 변화는 되었습니다만,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장관입니다. 귀하의 질문에 도움이 되실는지요.